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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바람소리7 2009. 1. 22. 16:01

영화 - 워낭소리









최노인은 마흔살이 넘은 소와 함께 살고 있다.

평생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짓는 최노인과

주인의 속내를 읽을정도로 교감하는 우직한 소

서로 한평생을 살아낸 노쇠한 육체는 최노인이나 소나 다 관절염으로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믿고 충실한 동행을 한다.

어쩌면 기계화를 거부하는 마지막 농민인 최노인은

소에게 신선한 꼴을 먹이기 위해 농약을 거부한다

하루하루 소꼴베는 일은

최노인이 젊었을 때 머슴을 살던 습관 그대로 맛있는 풀을 보면 소에게 먼저 먹이고 싶어

낫질을 하며 들판을 누빈다.

어렸을 때 침을 잘못맞아 인대가 오그라들어 평생 다리를 저는 최노인

쓰러질 듯 쓰러질듯 하지만 목숨이 살아있는 한 움직여야 한다는 이 시대 최후의 농민이 아닐런지

한 다리를 질질 끌며 소꼴을 베는 최노인의 모습은

이 시대 각종 공해물질로 포장된 먹거리가 판을 치는 모습에

신선한 경종을 울린다.

내 소에게만은 농약에 오염되거나 각종 홀몬이 들어간 사료를 거부하고

자연에서 오염되지 않은 태초의 먹이를 먹이고 싶은 가장 선한 모습이 아닌가.

그리고 이 시대 최후의 일소

소고기 파동 미국산 소고기 전면 개방등으로

소값은 하루가 멀다하고 떨어지는데 최노인은 자식이나 부인이 소를 팔아야 편안하게 산다고

사료도 안 주고 꼭 쇠죽을 끓여 주느라 새벽같이 일어나는 최노인의 우직스런 고집앞에

제발 소를 팔자고 애원한다.

눈이 안보이고 귀가 안들려도 워낭소리나 소의 울음소리에는 귀가 번쩍 뜨이는 최노인.

그런 최노인에게 소는 최고의 자가용운전자 노릇을 충실히 한다.

장에 갔다 달구지에 잠이 들어 깨어보니 집 마당이었던 일

차가 오면 찻길에서 스스로 차를 피할 줄 아는 소

그런 주인을 만나 남들은 고작 15년 내외를 살지만 최노인의 지극정성으로

40여년의 장수를 누린 소

둘 사이의 진정한 교감이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절로 일게 한다.

최노인의 몸이나 소의 몸이나 노쇠는 피할 수 없는 운명

최노인이 쓰러져 가까스로 몸을 가눈 후에 눈물을 흘리는 소를 끌고 우시장에 가지만

다 늙어 고기로도 쓰일 수 없는 소를 100여만은 쳐준다는 말에 500만원 주지 않으면 안판다고 고집을 부린다.

어쩌면 애초부터 팔 생각이 없는 게 최노인의 속내일지도.

결국 소를 다시 집으로 데려와 한몸으로 살지만

어느 날 소는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수의사는 마음에 준비를 하라 이르고 최노인은 쓰러진 소에게 일어나라 소리치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

코뚜레를 풀어주고 모든 멍에를 내려줄 때 가슴이 얼마나 막막한지

"좋은 데로 가라. 그동안 고맙다."

결국 소는 최노인의 손에 의해 마지막 땅에 묻힌다.

최노인의 말대로 저 녀석이 죽으면 내가 상주 해주지 하던 말대로

소를 먼저 보낸 최노인 

최노인의 손에 워낭만 남아

모두의 가슴을 울리며 워낭소리가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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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의 눈]‘워낭 소리’ 끊긴 곳에서 우리는

 


경북 봉화 하눌마을에는
평생 땅 속에 힘을 풀었던 농부가 살고 있다.
그리고 농부가 30년 동안을 부려온 소가 있었다.

농부 나이 여든, 소는 마흔이었다.
소 또한 평생 논밭을 갈고 달구지를 끌었다.

늙은 농부 귓가에는 언제나
워낭(소의 턱 밑에 달린 작은 종)소리가
맴돌았다.

가는 귀를 먹었지만
워낭 소리만은 크게 들렸다.
워낭소리가 요란하면
소에게 무슨 일이 있음이니 이는
소통의 도구였다.

노인과 소는 힘을 합쳐
농사를 짓고 9남매를 키웠다.
장성한 자식들은 도시로 나갔고
소만이 노부부 곁에 남았다.

노인은 소 먹일 꼴이 오염될까봐
논밭에 농약도 치지 않았다.
새참을 먹을 때는 막걸리도
나눠 마셨다.

어느 날 소가 쓰러졌다.
평균 수명이 15년인데 40년을 살았으니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수의사도 자연수명이 다 됐다고 했다.
그러나 노인은 믿지 않았다.

다시 일어난 소는
노인을 태우고 집과 논밭을 오갔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노인과 다리에 힘이 빠진 소,
둘은 절뚝거리며 느릿느릿 오고 갔다.
시간도 함께 풀어졌는지
죽음도 느릿느릿 다가왔다.

하지만 세월은
저 홀로 흐르지 않고
외딴 산골에도 스며들어
시나브로 기운을 뺏어갔다.
소는 간신히 달구지를 끌었고,
그 위의 노인은 꾸벅꾸벅 졸았다.
어느덧 모습도 표정도
노인과 소는 닮아 있었다.

쇠잔하여 앙상했다.
노인과 소는 특히 눈이 무척 닮았다.
속기가 빠져나간 무욕의 눈에서는
신성(神性)이 어른거렸다.


자식이 코뚜레였던 아버지들

다시 소가 쓰러졌다.
수의사는 노인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노인은 소에게서 코뚜레를 풀고
워낭을 떼어냈다.

그 손길이 성자와 같았다.

사실 코뚜레와 워낭은
평생 노인도 지니고 있었다.
노인의 코뚜레는 자식이었고
워낭은 위태로운 하루하루였으니
삶 자체였다.

죽음 앞에 노인은 덤덤했고
소 또한 그랬다.
소가 그 큰 눈을 감자 노인이 말했다.

“좋은 데 가거래이.”
모든 것을 쏟아낸 소는 가벼웠다.
포클레인에 매달린 주검이
겨우 송아지만했다.

노인도 결국 그렇게 떠날 것이다.

소는 제 힘을 모두 풀었던 땅 속에 묻혔다.
절대 평화였다.
‘차가 오면 미리 알고 피했던,
장에 갔다 달구지 위에서 잠이 들었는데
저 혼자 집을 찾아왔던’ 소에 대한 자랑도 함께 묻혔다.
우람했던 지난 날은 간 곳이 없고,
처마에 매달아 둔 워낭소리가 처연했다.


다큐멘터리 <워낭소리>
(감독 이충렬)는 이렇게 끝이 난다.
영화가 끝났지만
관객들은 늙은 소처럼 일어서지 못했다.
영화 속 농부는 울지 않았지만
(울음을 담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관객은 울어야 했다.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갔지만
영화관 측은 한참 동안 불을 켜지 않았다.
관객이 눈물을 닦을 때까지.
어둠 속에서 워낭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자식 걱정이 코뚜레가 되어
논밭에 묶여있던 우리 시대 아버지들,
그들은 그렇게 홀연 떠나갔다.


사람과 소의 교감과 동행은 흔했다.
농사를 지으려면 당연했다.
하지만 이제 지상에서 아주 특별한 일로 남아있다.
소들은 워낭 대신 일제히 번호표를 달았다.
사람의 친구가 아닌,
들녘의 일꾼이 아닌
그저 인간의 먹이로 사육되고 있다.

이름을 부르며 키웠던 가축들도 오간 데 없다.

워낭 소리가 사라진 들녘은
기계소리로 뒤덮였다.
땅은 스스로는 농작물을 키워낼 힘이 없다.
농약과 비료에 의존하여 농작물을 생산해낼 뿐이다.
이로써 몇 천년을 이어온 우경(牛耕)의 시대는
끝이 났다.

저 노인은
마지막 남은
우리 시대의 아버지이다.


힘을 땅에 풀었던 위대한 시간

워낭소리가 낭랑했던 시대와
기계음이 낭자한 시대에는
서로 다른 인류가 살고 있는지 모른다.
부리는 소와 먹는 소 사이에 우리가 있다.
마른 일소와 살찐 육우 사이에 우리가 있다.
배가 움푹 패었던 아버지와
뱃살이 오른 젊은이들 사이에 우리가 있다.
만져보면 우리도 배가 나왔다.

몇 천년을 이어온 것들이
우리 시대에 사라지는데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사람과 소가 함께 그 힘을 땅에 풀어
생명을 피워올리던 그 위대한 시간들에,
그 싱싱한 육체노동에 삼가
노래를 바친다.

그것이 비록 만가(挽歌)일지라도.

[경향신문/칼럼] 김택근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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