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들어서면서 쇠하기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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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내의 작은 문방구에 들어가는 아이들을 따라갔다. 일찌감치 군것질 거리를 쇼핑한 아이들의 조언을 얻어 신나는 쇼핑에 동참했다. 하나에 100원. 다섯 개나 골랐는데 500원이다. 강경 읍내를 돌아다는 동안 든든한 간식거리이자 골목에서 만나는 할머니들과의 관계를 돈돈하게 해준 일등공신이었다 |
교통의 요지이자 고깃배로 넘쳐나던 풍족했던 강경은 1920년대 이미 전기·수도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사람과 돈이 몰리니 은행이며 극장도 따라 들어섰다. 대전은 물론 금강 주변 부여·공주·군산 등도 강경 상권에 속했다고 하니 굉장한 규모다. 강경 읍내에 남아있는 등록문화재 구 한일은행강경지점(제324호), 구 강경노동조합(제323호), 강경북옥감리교회(제42호), 구 남일당한약방(제10호), 강경중앙초교강당(제60호), 구 강경공립상업고등학교관사(제322호) 등이 빛나던 그 시절을 읊조린다.
1914년 장항선 철도가 놓이면서도 이어지던 강경의 명성은 6·25전쟁을 전후로 끝난다. 전쟁 당시 공공기관이 모여 있던 강경 읍내는 폭격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육로 교통의 발달로 강경 포구의 역할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강경은 그리고 강경장은 그렇게 작아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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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경 읍내를 걷다보면 영화세트장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물 뿐 아니라 읍내에서 흔하게 만나는 이들이 옛날, 그 언젠가 빛나던 시절에 멈춰있기 때문일 것이다 |
여기서 잠깐, 강경 젓갈이 유명한 이유를 알아보자. 강경 포구에 고깃배가 쉴새없이 드나들던 시절, 팔고 남은 해산물을 처리해야 했다. 염장기술이 발달했던 이유다. 강경 젓갈은 젓갈축제와 함께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강경 읍내에 자리한 젓갈시장이 이를 증명한다. 새우젓이며 명란젓, 낙지젓 등 다양한 젓갈을 시식하는 재미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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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1931년 당시 교장 사택으로 건립된 옛 강경 공립상업고등학교 관사. 1920년대에 이미 수도와 전기가 들어왔다는 강경의 전성기를 보여준다. 한국 전통미에 일본식이 가미된 독특한 형태를 보인다 [가운데]강경 중앙초교 강당. 강경읍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근대식 교육기관이다. 1937년 준공 당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학교 강당의 모양을 보여준다 [오른쪽]남일당 한약방. 1920년대 충남과 호남을 통털어 가장 큰 규모였다고. 강경 포구는 온갖 재화와 사람들이 몰려드는 부촌의 심장이었다. 내부를 보고 싶다면 주말에 찾아가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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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갈을 맛보며 강경 읍내도 한 바퀴 걸어보자. 두어 시간 정도면 근현대사를 오롯이 품은 과거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먼저 강경읍사무소에서 지도를 챙기자. 강경읍사무소에서 강경고교와 강경여중을 지나 강상고교로 향한다. 옛날 강경상고가 강상고교로 바뀌었다. 강상고교 한켠에 1931년 교장 사택으로 지은 ‘강경공립 상업고등학교 관사’가 있다. 한국 전통에 일본식이 가미된 독특한 형태다. 다시 돌아 나와 강경여중 맞은편에 있는 중앙초교로 들어선다. 1937년, 강경읍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근대식 교육기관이자 체육관 겸용으로 지어진 강당이 있다.중앙초교 정문을 오른쪽에 두고 직진하면 구 남일당 한약방에 닿는다. 골목마다 안내판이 없으니 지나가는 이에게 묻는 편이 좋다. 1920년대 강경 시장 사진 속 건물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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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녀봉에 오르면 강경읍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배가 드나드는 강경포구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자리한 최초의 교회도 놓치지 말자 |
옥녀봉으로 향하는 길, 북옥감리교회와 만난다. 1923년 건축된 한옥교회로 지금도 교회로 사용되고 있다. 지척에 옥녀봉이 있다. 금강은 물론 방향을 바꾸면 강경 읍내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불과 100여년 전만 해도 고깃배들로 가득했을 강경 포구도 보인다. 시끌벅적한 포구의 모습이 그려진다. 말없이 자리를 지키는 강줄기는 무엇을 그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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